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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성권 박사의 건강편지 - 325
작성일자 2023-03-20
아프지 않은데 왜 병원에 가나?


<1> “뭘 도와드릴까요”라는 의사 말의 의미


의사가 처음 보는 환자를 진료하는 것을 초진(初診), 두 번째 이상 진료하는 것을 재진(再診)이라고 합니다.

초진일 때 의사는 환자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요즘 저의 첫 질문은 주로 “어디가 불편하세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뭘 도와드릴까요?”라고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의사가 환자에게 하는 말로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라는 반응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40년 이상 환자를 진료해오는 동안 세상이 크게 변화한 만큼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태도는 물론 말도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는 최근 질병 양상의 변화, 의학-의술의 발전, 질병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 의료권력의 이동 등 다양한 현상들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처음 대학병원 교수가 됐던 1980년대 초 의사는 환자에게 “어디 아파서 오셨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표현은 2000년대 초반까지 별 불편함 없이 사용했습니다.

그러다 15년 전쯤부터 저는 “어디가 불편하세요?”라고 표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질문의 요지가 ‘아픈 것’에서 ‘불편한 것’으로 바뀐 것이지요.

이 변화에는 주목해보아야 할만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건강에 탈이 났을 때 나타나는 주된 증상은 아픈 것(통증)입니다. 하지만 그 밖에도 고열, 설사, 어지럼증 등 다양한 증상이 있습니다.

사실 아픈 것(통증)은 질병의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하지만 통증은 워낙 흔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겁내기 때문인지 아픈 것에 대한 기억이 강렬합니다.

그래서 열이 나거나, 어지럼증, 기침, 가려움증 등이 있을 때도 “몸이 아프다”라고 말합니다.

“아프다”라는 말을 오랫동안 써온 탓인지 “몸에 병이 있다”라는 말과 동의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열 때문에 결석, 결근하는데도 “아프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통증이 없는데도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제가 진료하는 많은 만성콩팥병 환자들은 콩팥 기능이 투석이나 이식이 필요한 단계까지 악화해도 거의 아프지 않습니다.

이런 환자에게 “어디가 아프세요?”라고 물으면 “저 안 아픈데요”라고 답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아프지 않고 다른 이유로 병원을 찾은 사람에게 “어디가 아프세요?”라고 묻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대안으로 생각한 표현이 “어디가 불편하세요?”라는 것이었습니다. 불편함은 아픔보다 넓은 개념입니다.

평소와 비교할 때 유난히 피로하다거나, 물을 너무 많이 마실 때, 또는 소변을 너무 자주 보는 것 등도 다 불편함에 해당합니다.

그로부터 또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코로나19(COVID-19) 등의 감염병 이슈도 있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변화는 만성질환의 급증입니다.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만성콩팥병, 비만 등의 만성질환은 통계를 낼 때마다 환자수 신기록 행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만성질환의 중요한 특징이 통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비만은 합병증이 생긴 뒤 악화하기 전에는 대부분 아무 증상도 없습니다.

TV 드라마에서 고혈압이 있는 중년 남성이 스트레스를 받아 뒷목을 잡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의학적 근거가 없습니다. 고혈압은 아프지 않습니다.

통증만을 기준으로 본다면 고혈압은 병 같지도 않은 병입니다. 그래서 고혈압, 당뇨병, 만성콩팥병과 같은 질환을 생활습관병이라고도 부릅니다.

‘아픈 것을 질병’이라고 말하면, ‘아프지 않은 것은 질병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말이 생각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사례입니다.

따라서 아프다는 말은 통증에만 한정적으로 써야 하며, 전체 질병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환자에게 “어디가 아프세요?”라는 물음의 의미는 오래전에 끝났습니다.

그 대안인 “어디가 불편하세요?”라고 질문하는 시대도 저물고 있으며, “뭘 도와드릴까요?”라고 물어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의사의 품위가 없어 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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