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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 받은 저의 의사면허 번호는 1만4,000번 대입니다. 당시 한국의 인구는 약 3,500만 명이었고, 1인당 소득은 약 600달러에 불과했습니다.

40여 년이 흐른 2020년, 면허를 가진 한국의 의사는 11만5,000여 명으로 약 7.2배 늘었습니다. 그 기간에 인구는 약 45.7%, 국민소득은 50배 증가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의사의 주된 임무는 환자의 질환을 고치는 데에 있었습니다. 수술의 비중도 높았습니다. 서울대병원과 같은 상급병원들 뿐 아니라 많은 병원의 의사들이 중증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많은 시간을 써야 했습니다.

그 당시 중증 환자들이 유난히 더 많았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난했고 건강보험 제도도 없었으므로 몸이 아파도 제때 병원에 못 가고 병이 심해진 뒤에야 비로소 병원을 찾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의료 접근성이 낮았던 시절이었습니다.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를 중심으로 한 필수 의료의 비중이 컸습니다.

경제가 성장하고 1989년 전 국민 건강보험이 정착되면서 아픈 사람들이 쉽게 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와 함께 전에 없던 새로운 현상도 나타났습니다. 아프지 않은데도 병원에 가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을 가꾸는 데 돈을 쓰기 시작하면서 성형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쌍꺼풀 수술을 받는 여성들이 크게 늘었고, 라식 수술을 통해 안경을 벗는 사람들이 증가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의료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공의 중에서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이 인기과로 떠올랐습니다. 이를 두고 신세대 의사들이 유행에 너무 민감한 게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으나 의료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나 개혁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세상은 더 빨리 변화했습니다.

미국 등에서 콜레스테롤, 혈압 관리의 중요성이나 운동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연구가 쏟아져나왔습니다.

과거의 의사들은 사람들의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높은 콜레스테롤로 심장 관상동맥이 막혀 협심증, 심근경색의 질환을 일으킨 뒤에 치료하는 게 의료의 역할이라고 보았습니다. 의사의 본업이 예방보다는 치료에 있다고 본 것이지요.

하지만 환자가 된 이후의 치료는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에 예방이나 조기 발견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콜레스테롤이 높은 사람은 약물 복용이나 생활 습관을 고쳐 콜레스테롤 수치를 적절하게 낮춤으로써 심혈관질환, 뇌혈관질환을 예방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건강검진 제도도 활성화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금연, 운동, 건강한 식습관, 소금 섭취 줄이기 등이 건강과 수명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연구 결과들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의사들은 이런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임상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틈새를 종합비타민을 비롯한 건강기능식품 등이 파고들면서 시장을 키웠습니다. 암이 걱정되는 사람이 의사 대신 포털을 검색하고 보험 회사에 문의하기도 했습니다.

대중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의사들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사이에 건강의 상당 부분을 의료 외적인 곳에서 떠맡겠다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그 역할을 할 것이란 성급한 예측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예방이나 건강관리는 건강보험 수가로 보상을 받을 수 없는데 어떻게 의사들이 맡을 수 있겠는가?”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안 되는 것의 이유를 찾기보다는 될 수 있게 만드는 게 전문가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몇 달 이상 진행 중인 한국 의료의 파행 사태는 오랫동안 누적된 많은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생겼다고 봅니다.

질병에 비유한다면 만성질환이 오래돼서 합병증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의사 숫자만 늘리는 등의 ‘응급치료’만으로는 치료가 어렵다고 판단됩니다. 건강보험 제도 개선을 포함한 근본적인 의료 개혁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의사들도 대중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세상 변화를 이끌어나갈지를 고민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