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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의를 하던 1970년대까지 내과에서는 위장병이 가장 흔한 질환의 하나였습니다. 그다음은 간 질환이 많았지요.

그 때문에 1950~1960년대까지 대학병원 내과 전공의들의 노트는 약 2/3는 위장병과 간 질환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할 정도로 소화기 분야 공부의 비중이 컸습니다.

위장병 환자가 많았으니, 내과 전공의들도 이 분야 공부와 진료 경험을 쌓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50여 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요즘 가족이나 주변 지인 중에 ‘속쓰림’이나 ‘위장병’을 호소하는 사람을 찾아보실 수 있나요?

물론 위식도역류 증상으로 약을 먹거나 병원에 다닌다는 사람은 과거보다 증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외적인 한두 증상을 제외한 속쓰림, 소화불량 등을 겪는 사람들은 크게 줄었습니다.

많은 분이 과음한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위장약을 사 먹는 샐러리맨을 주인공으로 한 TV 위장약 광고를 기억하시지만, 그런 광고가 없어진 지 오래됐습니다.

그 많던 위장병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요?

위장병 감소에는 많은 원인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과음, 과식 등의 식문화가 없어지고 있으며, 신선한 채소나 과일 섭취가 증가한 것은 위장 건강에 ‘플러스 요인’이 되었습니다.

또 건강보험 덕분에 소화불량이나 속쓰림 증상이 나타나면 초기에 병원에서 진단받고 효과적인 약을 먹어 ‘병을 키우지’ 않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위염을 방치했다가 위궤양으로 나빠진 사례도 꽤 있었습니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제균 치료를 받는 사람도 많아져서 보균율도 줄었고, 1~2년에 한 번씩 위내시경을 받아 위장 질환을 조기 발견해 치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득 증가, 수돗물 보급이 늘어 깨끗한 물과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등의 사회적 변화도 위장병 발생을 낮춥니다. 또 냉장고 보급률 증가는 위장 질환이나 위암 발생률을 감소시킵니다.

못 살고 못 먹는 지역에 위장병이 흔하다는 사실은 연구로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속’은 편하고 안녕해졌을까요?

위는 편해진 게 분명합니다만, 장의 불편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습니다.

변비나 설사, 과민대장증후군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늘고 있으며, 그 외에 염증성 장 질환, 크론병 등 다양한 장 질환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장의 문제가 늘고 있는 주요 원인으로는 식습관 변화와 인구 고령화를 꼽을 수 있습니다.

소화기암에서도 위암보다는 대장암의 비중이 커지고 있습니다.

2022년 한국인 사망원인 통계를 보면 위암 사망률은 감소했습니다만, 대장암은 남성 암 사망률 3위, 여성 암 사망률 2위에 올랐습니다.

한국인은 이제 쌀밥보다 육류(고기)를 더 많이 먹습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졌던 채식 중심의 식습관이 불과 40~50년 만에 크게 바뀌고 있습니다.

고기뿐 아니라 햄, 소시지 등의 가공육 섭취도 많습니다.

반면 전통적인 한식에서 많이 먹었던 식이섬유의 섭취량은 상대적으로 줄고 있습니다.

이처럼 육식 비중이 더 높아지면서 설사, 변비 등 장 증상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한국인의 소화기 고민이 위에서 장으로 바뀌고 있는 것은 시대에 따른 삶의 변화가 질병 변화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식사 습관이 서구화되면서 소화기 질환도 위에서 장으로 변하지 않게 하려면 균형 잡힌 식사 습관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단순히 먹고 사는 것에 머물 게 아니라, 건강한 식단을 지키려고 애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