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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검진에서 혈당이 높다는 진단을 받은 60대 L씨가 진료를 받으러 왔습니다. 혈액-소변검사에서 그의 당화혈색소(HbA1c)는 7.1%로 나왔습니다. 그 후 추가 검사까지 종합한 결과 그는 ‘당뇨병’이었습니다.

그의 혈당 수치 외에 나이, 체중, 다른 만성질환 등을 고려할 때 당뇨병 약 복용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이를 설명하고, “당뇨병 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 꾸준히 드셔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L씨는 뜨뜻미지근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는 “운동으로 살을 빼보고, 그래도 혈당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때 약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습니다.

진료실에서 L씨와 같은 유형의 환자 사례가 의외로 많습니다.

의사의 설명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면서 의사를 설득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첫째 의료 권력의 이동이란 <건강 편지>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의료의 중요한 결정 권한이 의사에서 환자로 넘어갔습니다.

급성질환 치료에서는 여전히 의사의 몫이 큽니다. 출혈, 외상, 바이러스 감염병 등의 치료에서 의사의 결정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만성콩팥병처럼 오랫동안 치료-관리해야 하는 만성질환에서는 의사의 역할은 줄었고, 환자가 해야 할 일이 늘었습니다.

약 처방은 의사의 몫이지만, 운동하고 체중을 조절하는 등 치료의 많은 부분이 환자에게 달려 있으며 질병 관리에서 환자의 역할도 늘었습니다.

둘째 인터넷 등을 통한 의료 정보 접근이 쉬워졌습니다. 건강 정보를 다루는 TV 채널도 많아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각종 소셜미디어(SNS)를 통해서도 별의별 건강 정보가 돌아다닙니다. 진료받으러 와서 의사에게 “포털, TV에 나오는 의사는 다르게 말하더라”라고 대놓고 말하는 환자도 있습니다. 나름의 건강-의학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셋째 의료 접근성이 과거보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본인 부담금 몇천 원 또는 무료로 동네 의원에서 진료받을 수 있습니다. 건강보험 외에도 여러 보험을 가입해 있는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병원의 문턱이 낮아진 것은 바람직하지만, 의료 서비스의 가치가 떨어진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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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성질환을 진단받으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는 게 사실입니다. 암을 진단받을 때처럼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과정을 다 겪지는 않지만, 평생 또는 오랫동안 약을 먹어야 하고 생활 습관을 고쳐야 하는 상황을 힘들어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당뇨병이나 고혈압약 복용에 거부감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또 유난히 승부 욕이 강하거나 자수성가한 사람, 자신의 분야에서 뚜렷한 성취를 이룬 전문직 종사자 중에도 의사의 설명을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례가 많은 편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소신을 의사에게 말하고, 의사를 설득하려는 경향까지 보입니다.

만성콩팥병이 있는 50대 여성 K씨. 하루 단백질 섭취량이 100g이 넘고, 소금 섭취량도 13~15g으로 짜게 먹습니다. 이는 혈액-소변검사로 정확하게 확인됩니다.

이런 검사 결과를 설명해주면 K씨는 “저 짜게 먹지 않는데요”라고 정색하곤 합니다. 짜게 먹지 않았다면 그의 소변 속에 든 소금은 어디서 왔을까요?

40년 이상의 진료 경험으로 볼 때 L씨가 체중감량에 성공해 혈당을 낮추는 데 성공할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시간이 흐르는 이 순간에도 높은 그의 혈당은 혈관, 장기 등에 나쁜 영향을 주고 있을 것입니다.

고혈당의 폐해는 바로 나타나지 않으니 실감할 수는 없습니다.

세월이 흘러 당뇨병 합병증이 발생할 때쯤 뒤늦게 후회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시점은 10년쯤 후의 일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내가 내리는 판단의 결과를 미래의 내가 책임져야 하는 셈입니다. 그 결과가 가혹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5~10년 뒤의 스스로 큰 짐을 안겨줄 수 있는 판단이나 행동을 하고 계신 것은 없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