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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검진에서 단백뇨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신장내과 전문의를 찾아가서 진료를 받으면 의사가 “사구체여과율이 60mL/분 미만이 석 달 이상 이어지면 만성콩팥병으로 진단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고혈압으로 병원에 가면 의사가 약 처방전을 써주면서 “혈압을 120/80mmHg까지 낮추는 것을 목표로 삼아 약도 잘 드시고, 소금 섭취를 줄이며, 운동도 하셔야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만성콩팥병이나 고혈압을 진단-치료하는 의사의 말은 길지도,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장기간 치료받으시는 분들은 의사의 말이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 의사가 최신 치료법을 알고 내 치료에 제대로 적용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만약 다른 의사는 최신 진단-치료법을 알고 환자에게 적용하고 있는데, 나를 진료하는 의사만 모르고 있다면 내가 손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의사들은 무엇을 근거로 이런 진단, 치료를 하는 것일까요? 의대에서 배우는 교과서나 의학 논문에 그렇게 적혀 있을까요?

의사가 하는 진단-치료의 기본은 의과대학에서 배우고 경험한 것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수천 년간 쌓아온 의학과 의술, 임상 경험이 집대성된 것입니다.

또 인턴, 레지던트를 거치면서 환자를 진료하면서 익힌 임상 지식과 선배들로부터 전해 받은 경험까지 더해져 살아 있는 지식이 됩니다.

이는 오랫동안 검증됐다는 점에서 강점이 있습니다.

다만 근래의 연구 결과나 임상 현장에서 축적된 경험을 효율적으로 반영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의학 교과서는 20~30년 전 또는 그보다 더 오래된 의학지식을 바탕으로 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의사들은 모임을 결성해 질병의 <진료-치료 지침>을 펴냅니다.

제가 한국 신장내과 의사로는 유일하게 전체 위원회 멤버로 참가했던 ‘만성콩팥병 진료-치료 지침(KDIGO 2012)’ 작성 경험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전 세계 신장내과 의사들이 만성콩팥병 진단 치료에 대한 새로운 의견들을 제시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국제신장학회는 별도 조직인 KDIGO를 출범시키고 그 아래 전체 위원회와 세부 전문가 위원회 등을 구성해 만성콩팥병 진료-치료 가이드 라인 제정 절차를 시작했습니다.

둘째 만성콩팥병 진단과 치료에 관한 기존의 방법, 새로운 논문 등과 함께 환자의 인구학적 변화, 경제적인 변화 등을 종합해 잠정 진료-치료 가이드 라인을 작성합니다.

셋째 이를 내부에서 먼저 검토한 뒤 각 나라 신장내과 전문의 등 여러 의사에게 보내서 가이드 라인에 대한 의견을 모읍니다.

넷째 여러 의견을 종합, 분석한 뒤 퍼블릭 리뷰(public review)를 거쳐서 최종 진단-치료 가이드 라인을 확정해 전 세계에 배포합니다.

2012년 이 지침이 발표된 뒤 지금까지 전 세계 신장내과 의사들은 만성콩팥병 환자를 진단-치료할 때 이 가이드 라인을 기준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이드 라인은 가장 최신 치료 이론들을 다 반영하고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의학저널에 발표되는 논문은 1년에도 수백~수천 편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들 논문 중에는 너무 앞서가거나 장기 추적관찰을 통해 내용을 추가 검증해야 할 경우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의학저널에 나온 최신 논문을 바로바로 환자 치료에 적용하기는 힘듭니다.

간혹 의학저널에 실린 논문을 소개하는 TV나 신문 기사를 보고, 왜 이 치료법을 안 쓰냐고 묻는 환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논문으로 발표된 것 중에서 얼마 뒤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이 95%나 됩니다.

의학저널에 발표된 학술 논문을 바로 치료에 적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의사의 진단-치료는 가이드 라인 등을 기본으로 하면서, 최신 논문은 참고로 할 수는 있습니다.

과거에는 한 번 만들어진 가이드 라인을 약 10년쯤 이용했습니다만 새로운 연구 결과가 쏟아져 나오고, 임상 경험도 많이 축적되고 있으므로 새 가이드 라인 제정 기간을 단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얼마 전 KDIGO로부터 새로운 <만성콩팥병 진료-치료 지침> 내용을 검토해달라는 요청의 이메일을 받고 10여 년 전의 일이 생각나서 말씀드렸습니다.

진료실에서 의사가 하는 몇 마디 짧은 말에도 의학의 긴 역사와 많은 사람의 수고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