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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3일 발송해드린 <건강 편지>는 식생활의 서구화와 그에 따른 질병의 서구화를 담았습니다.

그런데 흔히 서구화(西歐化)라고 무심코 쓰고 있는 말은 과연 타당할까요?

요즘 한국인은 옛날보다 고기(육류)와 빵을 많이 먹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선진국이 된 유럽과 미국 사람들의 식생활과 비슷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식생활이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과 닮아간다고 해서 ‘식생활의 서구화’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서구화’라는 말에는 서구 사람들의 삶을 따라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서구화’라고 해서 우리의 목표가 ‘서구인의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도달하려는 목표에 서양인들이 먼저 도달했을 뿐이지요.

식생활을 예로 들면 고기, 우유와 유제품 등을 넉넉하게 먹는 것이 서구인들만의 고유한 삶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잘살게 되면 누리는 보편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인들은 근대-현대 문명 발전을 선도했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을 주도했고, 1~3차 산업혁명도 이끌었습니다. 뒤늦게 산업화에 나선 저개발국이나 개발도상국들은 ‘서구인의 삶’을 따라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서양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든 왕, 귀족, 양반 등 부유한 사람들은 고기(육류)가 많은 풍요로운 식단을 누렸습니다. 그들의 밥상에 오르는 음식의 종류는 다양했고, 칼로리와 영양소 섭취량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삶의 ‘부조리’, ‘불합리’는 식탁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육류가 많은 고칼로리 식단이 건강을 보장해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의대 교수가 됐던 1980년대 초 유럽과 미국인들은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비만, 만성콩팥병과 같은 만성질환으로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그 당시 의학저널에 실리는 유럽, 미국 의사들이 쓴 만성질환에 대한 논문들을 접하면서 ‘우리도 잘살게 되면 이렇게 될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눈앞의 먹고사는 문제 해결이 절실했던 우리에게 유럽과 미국인들의 문제는 ‘남의 일’처럼 보였습니다.

40여 년 세월이 흘러 한국인의 1인당 GDP는 선진국에 진입했고, 잘 먹고 잘살게 되었습니다. 서구 사람들이 앞서 경험한 식탁의 풍요로움을 우리도 누리게 됐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나타났던 만성질환이 우리에게도 급증하고 있습니다. 과거 한국인에게 많았던 위암, 간암 등은 감소하고, 서구인들에게 많은 대장암, 유방암, 전립선암 등이 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구화’는 식생활만으로 그치지 않으며, ‘사회경제적’ 또는 ‘문화적’인 변화까지 포함합니다.

샤워할 수 있는 가정이 늘면서 위생이 개선되었으나, 자동차나 엘리베이터 보급이 늘면서 걷는 양이 줄어든 것도 해당합니다.

‘서구화’라고 말할 때 풍요로워지는 식생활에 치중하지만, 사실은 사회적-경제적-문화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뉴욕의 맨해튼은 미국에서도 부유한 지역입니다. 이곳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의 당뇨병과 합병증 발생률은 미국 평균보다 낮습니다. 부유함이 식단을 풍성하게 하고, 그에 따라 비만과 만성질환 증가로 이어진다는 생각에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맨해튼 주민들은 부유하지만, 육류 등의 고칼로리 음식을 배불리 먹지 않습니다. 그 덕에 비만과 만성질환의 덫에 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맨해튼 주민들은 채소와 과일을 위주의 식사를 하고, 싱겁게 먹으며, 규칙적으로 운동해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려고 애씁니다. 흡연율-음주율도 낮습니다.

이렇게 노력해도 만성질환이 생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며 약을 잘 먹고, 금연-절주-적정체중 유지-운동-건강한 식단 등 생활 습관을 적극적으로 개선합니다. 이렇게 실천하면 만성질환이 있어도 그로 인한 합병증 발병은 적어집니다.

앞으로 상당 기간 한국인의 삶은 서구인들이 먼저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경로를 따라갈 것입니다. 그것이 이상적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여유롭고, 또 부유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식생활의 서구화’를 끝없이 되뇌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보다 먼저 겪은 사람들의 사례들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대책을 수립하는 것입니다. 왜 ‘서구인’인 맨해튼 주민들은 ‘서구화’를 넘어서서 더 나은 다른 길로 가고 있는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