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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암이나 심혈관 질환의 증가 원인을 설명하면서 “식생활이 서구화됐기 때문”이라고 하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서구(西歐)는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유럽과 미국, 캐나다 등 북아메리카 나라를 지칭합니다. 서구는 어느 한 나라가 아닌 큰 문화권이므로, 세부적으로 보면 식생활에 차이가 꽤 있긴 합니다만 대체로 고기 섭취가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

이때 ‘고기’는 붉은 고기인 육류와 닭고기 등을 가리키며, 생선은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식생활이 서구화되고 있다’라는 말은 육류를 많이 먹지 않고 살아오던 사람들이, 점점 육류를 많이 먹게 된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 눈길을 끄는 기사 한 건이 보도되었습니다.

전국한우협회의 조사 자료를 인용한 이 보도에 따르면, 2022년 한국인 1인당 연간 육류(닭고기 포함) 소비량은 56.5kg으로, 1인당 쌀 소비량(54.1kg)을 처음 추월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한국인의 1인당 연간 육류 소비량은 1970년 5.2kg이었다가 2000년 31.9kg, 2020년에 54.3kg으로 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반면 1970년 1인당 136.4kg이던 한국인의 연간 쌀 소비량은 2000년 93.6kg, 2020년에는 57.7kg까지 감소했다고 합니다.

52년 전 쌀을 육류보다 26배나 더 많이 먹던 한국인이 이제 같은 양을 먹게 됐고, 최근의 쌀 소비 감소세 등을 고려하면 앞으로는 육류 섭취량이 확실하게 쌀 소비량을 넘어설 전망입니다.

이는 진료실에서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혈액 검사를 해보면 하루 단백질 섭취량이 권장량(약 50~60g)의 두 배 가까이 나오는 사례들이 많습니다. 콩이나 생선 섭취만으로는 이렇게 많은 단백질을 먹기는 어려우며, 육류를 꽤 많이 먹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라는 말은 옛날 말이 돼가고 있는 것이지요.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전통적인 한국인의 식문화는 최근 들어 급속도로 달라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미국에 이민 가서 미국 사람들처럼 먹으며 살아가는 것에 비유할 수도 있겠습니다.

음식은 하나의 문화입니다.

육류를 많이 먹게 된 배경으로는 지난 50여 년간의 눈부신 경제성장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입니다. 또한 해외 주재원이나 유학 등 외국 체류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점, 서양 대중문화의 영향도 작용했을 것으로 풀이됩니다.

육류 섭취 증가는 건강에 긍정-부정 영향을 동시에 주었습니다.

우선 청년-청소년층의 체격이 커진 데는 육류 섭취량 증가의 영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중년 이상 독자들께서는 1970년대까지 축구 국가 대표팀이 유럽 팀과 경기할 때마다 중계진이 키와 체격의 열세를 탄식했던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스포츠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의 체격과 체력 열세를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명(明)이 있으면 암(暗)도 있습니다. ‘식생활의 서구화’는 ‘질병의 서구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육류 섭취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된 대장암, 전립선암 등 몇몇 암과 심-뇌혈관 질환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동맥경화증이나 만성콩팥병, 이상지질혈증 등 만성 질환들도 늘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육류 섭취량 증가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될 것입니다. 그와 함께 육류 섭취에 따른 건강의 문제점들도 점점 증가할 것입니다.

한국인의 식생활이 서구화되고 있습니다만, 정작 서구에서는 육류 섭취를 줄이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건강 편지>에서 소개해드린 적이 있는 고혈압 환자를 위한 ‘DASH 다이어트’나 ‘하버드대 건강 식단(Harvard Healthy Diet)’ 등을 보면 공통적으로 육류 섭취를 제한하고, 생선, 채소, 과일을 충분히 섭취하라고 돼 있습니다.

즉 건강한 식단의 핵심이 ‘채소와 과일 넉넉히 섭취’ ‘통곡물의 적절한 섭취’ ‘생선, 콩, 우유와 유제품, 견과류 섭취’ 등입니다. 육류를 많이 먹으라는 내용은 어딜 찾아봐도 없습니다.

한국인인 서구인의 식단을 계속 쫓아가는데, 정작 서구인들은 채식-생선-콩-현미 등 한국인들이 즐겨 먹던 식단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식생활에서 ‘한국인은 서구화’, ‘서구인은 한국화’를 하려고 하는 이 현상,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