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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 검사에서 60대 A씨의 당화혈색소는 7.2%로 나왔습니다.

당화혈색소는 최근 석 달간 혈당의 평균 농도를 %로 보여주는 수치로, 정확도가 높습니다. 일반 혈당 수치(mg/dL)는 식사나 운동 등에 의해 오르내림의 편차가 크지만, 당화혈색소는 최근 3개월간 평균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당뇨병 최종 진단에는 여러 요소를 고려하므로 당화혈색소 숫자에만 한정하지는 않습니다만, 대개 당화혈색소 6.5% 이상은 당뇨병으로 봅니다.

정상 당화혈색소는 4~5.6%이고, 5.7~6.4%까지는 당뇨병 전 단계로 분류합니다.

그의 당화혈색소는 몇 달 전 이미 당뇨병 진단 기준인 6.5%를 넘었고, 이번에는 0.7% 포인트나 초과한 것입니다.

A씨에게 “당뇨병입니다. 운동-식사요법과 함께 치료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약물 치료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수도 있으나, 체중 감량과 식사요법은 하루빨리 시작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제 저녁 식사 때 와인을 마셔서 일시적으로 혈당이 높아진 것으로 보입니다”라며, 당화혈색소가 높은 상황을 애써 합리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식사와 와인이 혈당에 영향을 주었을 수는 있습니다만, 당화혈색소 수치로 볼 때 일시적 혈당 상승은 아닙니다. 그는 당뇨병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

당뇨병, 고혈압, 만성콩팥병 등 만성질환을 처음 진단받을 때 A씨와 유사한 반응을 보이는 사례들이 적지 않습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퀴블러 로스가 제시한 죽음 또는 슬픔을 맞을 때 보이는 5단계(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지요.

A씨는 “와인을 좀 줄이고 한 달 뒤 다시 검사를 받아보고 싶다”라고 말했고, 저는 “그러시라”라고 답변해주었습니다.

이에 대해 “당뇨병이면 이제 치료를 시작해야 할텐데, 의사로서 무책임하지 않은가?”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40년 이상 환자 진료 경험으로 볼 때 의사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환자를 치료로 이끌려면 ‘전략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단호하게 치료하시라고 말하는 것이 효과적이지만, A씨와 같은 사례에서는 그 방법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의사가 서둘러도 환자가 따라오지 않을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초기에는 의사의 말을 잘 따르는 것처럼 보이다가 얼마 안 가 엇길로 새는 사례들도 적지 않습니다.

콩팥 이식 수술 후 실패의 가장 큰 요인이 ‘약물 복용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만성신부전 상황에서 콩팥을 이식받아 큰 고비를 넘긴 사람은 이식 후 건강관리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식 수술 직후의 긴장감은 시간이 흐르면서 느슨해지고, 몇 달이 지나면 정기적인 병원 진료, 약물 복용을 거르는 사례들도 생겨납니다.

콩팥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할 때의 절박함이 사라지고, 콩팥병 없이 건강했던 시절로 되돌아간 듯 행동하는 것입니다. 수술 후 관리요령을 의사가 아무리 신신당부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는 청소년, 청년기에 콩팥 이식 수술을 받았을 때 흔히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식받은 콩팥이 또 망가져 두 번째 이식 수술을 받기도 합니다.

혈당, 혈압, 콩팥 기능 저하 등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며, 몸 상태를 개선할 의지까지 부족한 환자에게 어떤 치료법을 적용해야 할지는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의료 권력의 이동’이란 <건강 편지>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만성질환 관리-치료의 주체는 환자입니다.

병을 아는 것(받아들이고)과 실천(개선 노력)은 개인의 몫입니다.

만성질환 치료의 ‘정답’은 없습니다.

환자가 ‘부정’하더라도 단호한 말로 빨리 치료하게 해야 할 때도 있으나, 반대로 시간을 갖고 설득하면서 약을 잘 먹게 하고 생활 습관 개선을 유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성질환 치료에는 질병에 대한 지식, 약물의 임상효과, 치료에 대한 환자의 순응도(compliance) 등 수많은 요소가 관여합니다.

그래서 만성질환 치료를 ‘예술’에 비유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