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70대 초반의 초진(初診) 남성 환자 A씨. 진찰 소견과 소변, 혈액검사 결과 대부분의 항목이 정상 범위 안에 있었으나 적혈구 수치가 유난히 높았습니다. 담배 피우시냐고 물었더니 오래 전 금연했다고 했습니다.

특별한 질병 등이 없는데 이렇게 적혈구 수치가 높게 나오는 경우는 상당히 이례적입니다. 추가 문진(問診)을 통해 원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전부터 남성호르몬(테스토스테론)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감소한 성욕을 되살리고 싶어서였다고 합니다.

성인의 혈액 양은 약 5L입니다. 체격, 체중에 따라 조금 더 많은 사람도, 적은 사람도 있습니다만, 대체로 일정하게 유지됩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혈액 양이 증가할 때가 있습니다. ‘혈액 양 증가’의 원인 중 하나는 ‘적혈구 양 증가’입니다. 적혈구의 양도 일정한 범위를 유지하는데, 너무 많아지면 혈액 양도 증가하게 되는 것이지요.

적혈구는 산소를 운반합니다. 적혈구가 많아지면 산소를 더 많이 운반할 것이니 좋지 않냐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적혈구 양은 어떨 때 증가할까요?

적혈구가 일산화탄소와 결합할 때입니다. 적혈구는 산소와 결합했다가 세포에 산소를 전달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일산화탄소의 결합력이 산소와 결합력보다 훨씬 강하다는 데 있습니다.

일단 일산화탄소와 결합된 적혈구는 제 기능을 상실합니다. 이런 적혈구는 혈액 속에 있어도 ‘쓰레기’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부족해진 적혈구를 보충하기 위해 인체는 적혈구를 추가 생산해야 합니다.

골수에서 만들어진 적혈구는 약 120일 동안 활동하고 없어집니다. 일산화탄소와 결합돼 쓸모없는 적혈구가 길게는 120일까지 혈액 속을 돌아다니다보니 혈액의 양이 점점 증가합니다.

이처럼 적혈구와 일산화탄소 결합 원인은 흡연이 대표적이고, 고산(高山) 등산 때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요즘은 거의 없어졌습니다만, 연탄가스 중독도 포함됩니다. 가스보일러도 연소 가스가 정상 배출되지 않으면 사고를 일으키는데 이 역시 일산화탄소 중독이며 혈중 적혈구 증가를 유발합니다.

앞의 환자 사례에서처럼 남성호르몬 치료도 적혈구 증가 현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한 때 남성호르몬이 빈혈환자의 치료에 사용된 적도 있습니다.

가벼운 적혈구 증가 현상이 일시적으로 발생하더라도 인체가 정상으로 되돌리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심한 적혈구 증가 현상이 오래 지속되면 혈전이 만들어져 심혈관 또는 뇌혈관을 막아버릴 수 있습니다. 이미 관상동맥이나 뇌동맥이 좁아져 있는 부위에 적혈구가 뭉쳐 형성된 혈전이 달라붙어 혈액 공급을 막는 현상, 즉 허혈성 심근경색증이나 허혈성 뇌경색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금연은 적혈구 증가를 막기 위해서도 필수적입니다. 고산 등반이나 격렬한 운동도 적혈구 증가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요즘 에베레스트 등 고산 트래킹에 참가하는 일반인들이 꽤 있습니다. 평소 심장이나 뇌혈관 건강에 이상이 있으면 산행 전에 병원에서 철저히 몸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요구사항이 건강에 심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적혈구도 과유불급입니다.

적혈구가 부족한 빈혈은 건강에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적혈구가 너무 많은 증상 역시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