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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 신장내과 후배, 제자들인 교수, 전문의 몇 명과 송년 식사를 했습니다. 모임의 주요 화제의 하나가 “환자들이 뭘, 어떻게 먹게 하는 게 좋을까?”였습니다.

신장내과 전문의들이 콩팥병 환자의 식사 이야기를 한 것이 뭐 대수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40년간 신장내과 교수, 전문의로 환자를 진료해온 제게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습니다.

과거 이런 모임에서는 콩팥병 분야의 최신 논문, 진단과 치료 동향 등이 주로 대화의 주제가 됐습니다. 그때 누군가 환자 식사를 주제로 꺼냈다면, 다른 참석자들로부터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 의사’라는 평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왜 이런 변화가 나타났을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현대 의학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50~60년대에는 의학 연구의 중점은 실험실, 해부학 실습실 등에 있었습니다. 즉 의학 연구의 중심이 해부학, 생리학, 생화학 등 ‘학문’에 있었습니다.

1970년대 들어 의학 연구의 중심이 기관(器官)으로 옮겨가는 한편, 동물실험도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의학 연구의 중심이 콩팥이나 심장, 갑상선, 뇌하수체 등 ‘기관’으로 바뀌었습니다.

1980~1990년대에 들어서는 살아 있는 사람, 즉 ‘전인적(全人的)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임상연구들이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70년대 이전까지 의학에서 실험과 임상시험의 비율이 90대 10이었다면, 80년대에 역전돼 최근에는 10대 90으로 바뀌었습니다.

임상시험의 대표적인 사례가 1993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미국에서 16만 여명의 폐경여성들을 대상으로 실시됐던 ‘여성 건강에 대한 주도적 연구(WHI: women's health initiative)’였습니다.

과거 실험실 연구에서는 결과가 나와도 진료에 직접 적용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WHI에서 폐경 여성의 호르몬 치료가 유방암 위험을 높이는 것이 확인돼 호르몬 요법이 중단되는 등 의료 현장에서 변화가 바로 나타났습니다.

현대 의학의 최근 역사를 요약하면 ▲1단계: 학문, 세포 또는 생리→▲2단계: 기관→▲3단계: 환자, 대중(大衆)으로 옮겨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1~2단계의 연구 성과들이 축적됐기 때문에 중점이 3단계로 옮겨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1~2단계가 중시됐던 시절에는 이에 대한 학문 지식을 많이 배운 의사가 실력 있는 의사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전문의들의 대화 주제도 주로 의학 학문, 세포나 기관 등에 대한 최신 이론들이었습니다.

이 때 신장내과 전문의는 환자를 진료할 때도 콩팥 조직이나 기능 이상 등에 주로 집중했을 뿐, 환자의 식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환자들이 진료실을 나가면서 “뭘 어떻게 먹어야 하지?”라는 궁금증을 풀지 못했습니다. 의사들이 ‘사람(환자)’보다 ‘질병’을 더 중요하게 보는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제기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연구와 임상시험 성과들이 축적되면서 1990년대부터 의학의 중점이 세포, 기관이 아닌, 전인적(全人的) 사람으로 옮겨졌습니다. 전인적 사람에는 환자와 환자가 아닌 일반인 모두 포함됩니다.

아울러 금연, 절주, 운동, 체중 유지, 싱겁게 먹기 등 건강한 식단이 질병 예방과 치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믿을만한 연구로 증명되기도 했습니다. 질병의 주된 양상이 급성질환에서 만성질환으로 변한 것도 큰 작용을 했습니다.

건강편지에서 ‘의료 권력의 이동’에 대해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과거 세포, 기관을 중시하고 급성질환이 많았던 시절에는 의료에서 의학 지식으로 무장한 의사의 비중이 컸습니다. 하지만 만성질환 관리나 치료에서는 의사의 진료보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환자들의 실천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예컨대 만성콩팥병 관리에서는 신장내과 전문의의 역할은 줄고 있는 반면 싱겁게 먹고, 운동하고, 약을 챙겨먹는 환자의 역할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장내과 전문의들의 모임에서 ‘환자들이 무엇을 먹는 것이 좋은지’를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과거 사소하게 여겼던 환자의 식사에 대해 의사들도 본격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이는 의료 권력의 이동을 보여주는 한 사례입니다.

올 한 해 건강편지에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도 더 충실하고 유익한 건강편지로 보답하겠습니다. 건강편지를 묶어 2018년 펴낸 ‘건강편지 1권’에 이어 최근 ‘건강편지 2권’을 출간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년 경자년(庚子年) 새해, 독자 여러분의 만복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