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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팥병 환자들을 진료하다보면 안타까운 사연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중에는 영문도 모른 채 급성신부전에 빠진 분들도 있습니다.

대학병원에 재직 중이었을 때는 물론 개원하고 있는 요즘까지 해열진통제를 과용(過用)하고 콩팥이 망가진 사례를 종종 봅니다. 콩팥 기능이 너무 많이 떨어졌으면 신장 투석을 해야 하며, 약물 치료도 합니다.

이 분들에게 해열진통제가 원인이라고 설명하면, “약국에서 사먹은 해열진통제가 콩팥을 망가뜨렸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억울한 반응을 보입니다.

호주에서 해열진통제 복용이 만성 콩팥 손상 원인 1위라는 사실은 이미 연구결과로도 발표돼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아직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콩팥 손상의 상당수가 해열진통제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스피린과 같은 흔한 해열진통제가 콩팥을 망가트릴까요?

인체의 혈압은 너무 높아도, 너무 낮아도 안됩니다. 높으면 낮춰주고, 낮으면 높여줍니다. 여기에는 여러 호르몬과 생리활성 물질들이 관여하는데 혈압을 높일 때는 ‘레닌’이란 호르몬, 낮출 때는 ‘프로스타글란딘’이라는 물질이 주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혈관을 확장해 혈압을 낮추는 프로스타글란딘은 염증과 통증에도 관여합니다. 프로스타글란딘의 작용을 차단하면 통증이 준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를 약으로 만든 것이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NSAID)입니다. 아스피린, 브루펜, 낙센, 아섹, 애드빌, 게보린, 사리돈, 피록시캄 등이 이에 해당되며, 타이레놀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는 관절염 치료제로도 흔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로스타글란딘의 작용을 차단해 통증을 줄이는 약효만 있으면 좋은데, 만만치 않은 부작용도 있습니다.

해열진통제를 복용하면 혈관 확장 작용을 하는 프로스타글란딘이 차단돼 혈관이 좁아집니다. 콩팥도 마찬가지인데, 콩팥으로 유입되는 혈액의 양이 줄어듭니다. 콩팥은 하루 180~200L의 혈액을 걸러야 하는데, 혈액이 너무 적게 들어오면 콩팥 혈관 일부가 파괴될 수 있으며, 심하면 급성신부전까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전 고입, 대입시험에 체력장 제도가 있었을 때입니다. 한 여학생이 800m 오래달리기를 한 뒤 소변이 나오지 않아 병원에 왔는데 진단 결과 급성신부전이었습니다. 이 여학생은 이틀 전 감기로 아스피린을 복용했다고 하였습니다. 달리기를 할 때는 ‘레닌’이란 호르몬의 작용으로 피가 심장과 근육에 많이 가는 대신 콩팥에는 덜 가게 됩니다. 하지만 콩팥에 피가 너무 적게 가면 콩팥이 손상될 수 있으므로 프로스타글란딘이 작용해 콩팥으로 가는 혈관을 확장해줍니다. 그런데 아스피린이 프로스타글란딘의 작용을 억제, 콩팥으로 가는 혈관이 확장되지 않아 혈액 공급이 줄었고 이것이 급성신부전을 불러왔던 것입니다.

'해열진통제 1kg의 법칙'이란 말이 있습니다. 누적 복용하는 비스테로이성 진통제의 총량이 1kg을 넘으면 콩팥이 망가지기 시작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만약 500mg짜리 약 두 알을 먹으면 하루 1g이고, 1년 동안 매일 먹으면 365g에 이릅니다. 만약 이렇게 3년 동안 해열진통제를 복용한다면 3년이 채 되지 않아 콩팥이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많은 양의 해열진통제를 매일 먹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관절염 약을 매일 먹는 사람이 두통이나 근육통이 있다고 해서 해열진통제를 자주 먹다보면 어느 순간 총량이 1kg에 이를 수 있습니다.

통증이 심한데도 억지로 참으시라는 뜻은 아닙니다. 적절한 약으로 통증을 잘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다만 운동 후 또는 감기 몸살로 온몸이 쑤신다고 해열진통제를 함부로 복용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관절염 등 만성질환으로 평소에 소염진통제 계통의 약을 먹는 사람들이 해열진통제를 많이 복용하면 적정 용량을 초과해 콩팥 손상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아야 합니다.

또다른 해열진통제인 타이레놀은 콩팥 손상 부작용은 없습니다만, 음주 후 복용하면 급성 간 손상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전문약은 부작용이 많고, 약국이나 편의점 등에서 편하게 살 수 있는 일반약은 부작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전문약이든 일반약이든 모든 약물은 남용(濫用)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